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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램브란트 - 명과 암에서 탄생한 미술가(2)

램브란트는 유화뿐만 아니라 식각이나 드라이포인트 기술을 사용하여 판화도 제작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판화를 독학했다고 한다. 화가가 되기 전에 어머니를 모델로 한<늙은 여인의 흉상>,<늙은 여인의 얼굴>과 암스테르담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예술가가 동판화의 재능을 가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또한 평생 자화상을 그려온 것처럼 초상화가로서 사스키아와 함께 자기 자신을 그린 동판화를 남겼다.

 

1630년대 램브란트는 성경 에치를 여러개 만들어 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등이다. 그는 또 에칭ㄴ의 명암을 최대한으로 표현했다. 예를 들어 윤곽선을 어둡게 그리면 색을 옅게 하거나 윤곽선을 완전해 제거해 그 형상과 광택을 밝혀 어둠에서 발광하는 효과를 얻어냈다.

 

1642년, 아내 사스키아는 한 살배기 아들 티투스를 남기고 죽었다. 2명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은 총 5명이었는데, 이들 중 살아남은 아이는 티투스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램브란트는 상심했지만, 화가로서 성숙해 풍요로운 작품세계를 열었다. 그의 많은 걸작은 이때 나왔다. 그의 대표작 <야경>도 이때 나왔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의 거장 길드 크로베니아의 집단 초상화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하여 민병조직을 이루고 있는 네덜란드 시민들을 그리고 있다.

 

기존 집단사진과 달리 램브란트의 작품들은 극의 한 장면과 같은 화면을 만들어 생생한 표정과 몸짓, 드라마틱한 효과를 대비시켜 화면 전체에 긴장감과 할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부유층의 요구에 따라 그려진 이 작품은 단체 초상화로써 큰 결함이 있었따. 등장인물들의 비율이 다른것과 함께, 다른 등장인물이나 얼굴의 명암이 영향을 받는 것이 문제였다. 이 그림에서 자신의 얼굴이 잘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항의하여 램브란트의 평판은 떨어져갔고, 스폰서로부터 외면 받았다.

 

게다가 야경의 영향으로 작품 수주가 줄면서 램브란트는 도산 직전까지 몰렸다 .사스키아가 죽기전 집을 너무 많이 사들여 무모한 투기를 하기도 하였다. 램브란트는 또 사스키아 사후 하녀들과 관계가 있었는데, 재혼을 하면 사스키아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게 되므로 재혼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게르테라는 하녀와 갈등을 겪었고, 램브란트의 평판은 더 떨어졌따. 하녀 헨드리케는 그의 아이를 임신시켜 교회 위원회에 호출되기도 하였다. 헨드리케는 그의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 베드로의 부인>,<포목상 조합 이사들>등의 작품에서 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고, 하녀, 아들, 자신을 모델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램브란트만큼 자화상에 매료된 예술가는 없었따. 그는 젊었을 때부터 자화상을 그려왔고, 만년에는 자화상을 더 많이 그렸다. 그는 때로는 화가로써, 때로는 신사로써, 때로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써 자신을 그림속에서 표현하였다.